자료실2007.08.30 11:49

판례펼치기

성폭력 가해자 '술에 취해서'는
감형이유 될 수 없다

이선미 l 상근활동가

자신의 성추행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 뒤 ‘술에 취해 음식점 주인으로 착각했다’고 말해 지탄받았던 최연희 의원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범행 당시 만취해 변별력과 의사능력이 없는 ‘심신상실’ 상태였다는 것이다. 비단 최연희 의원만이 아니다. 많은 성폭력 사건에서 술은 성폭력가해자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등장한다. 심신상실을 인정받는 경우 형법 제 10조에 의해 무죄 또는 감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형법 10조 1항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 
2항 심신장애로 인하여 전항의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


이러한 법조항을 이용하기 위한 성폭력 가해자들의 ‘술’변명은 술 마신 후 이성이 정지된 상황에서 성추행은 있을 수 있는 실수 정도로 묵인하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문화 속에서 힘을 얻는다.

최의원이 급성알콜 중독이었으며 범행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옹호하는 지지자들과 남자가 술먹으면 그럴수도 있다고 여기는 우리의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최연희 의원은 비록 술에 의한 심실상실을 인정받지는 않았지만 우리 사회가 술먹은 가해자의 성욕에 얼마나 관대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례임은 분명하다.

술취한 성폭력 가해자에 관대한 문화와 법원의 판결이 만나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 사건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최근 박명수 전 우리은행 여자농구단 감독의 판결문에서 이러한 내용을 확인한다. 자신이 지도하는 선수를 성추행 한 혐의(미성년자 추행)로 기소된 박 전 감독에게 법원(서울중앙지법 형사1단독 한양석 판사)은 7월 6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을 선고했다. ‘박 전 감독이 감독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어린 피해자를 추행하고 고통을 준 데 대해 엄벌에 처해야 마땅하다’면서도 징역형을 내리지 않은 이유를 ▲ 전지훈련 첫날 평소보다 많은 주량을 마셔 만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점 ▲ 10여년간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농구계 발전과 국위선양에 힘쓴 점 등이라 밝혔다.


술에 만취해 인사불성이 되더라도 강제추행은 하고야 마는 감독의 범행에 면죄부를 준 법원의 판결은 성폭력이 참을 수 없는 성욕에 의해 일어난다고 믿는 잘못된 통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 이성이 마비되고, 이성이 마비되면 성욕이 발동한다. 발동한 성욕은 참을 수 없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성적 실천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이 사건은 감독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자신의 관리․감독 아래 있는 선수에게 위력을 이용해 저지른 성폭력인 것이다. 성폭력 사건이 참을 수 없는 성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의 하나라는 것을 드러내 주는 전형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만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가해자의 말을 그대로 차용하여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재생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최근 주목할 만한 판결이 있다. 올해 1월 서울 영등포구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귀가하던 피해자에게 강제로 입을 맞춘 이모(60세)씨에게 서울남부지법이 징역 6월을 선고한 것이다.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상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에게 이 같은 형을 선고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수사기관에서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술을 마셔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라며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전혀 반성하는 빛을 보이지 아니하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그 행위에 상응하는 엄정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위의 각 사건에서 가해자들이 자신의 행동의 합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관되게 ‘술핑계’를 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음주운전은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는 것 자체를 처벌한다. ‘만취했기 때문에 자신이 운전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판결은 지금까지 술취한 가해자의 범행에 면죄부를 주던 법원 판결을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님을 주장하는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그들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내리는 법원의 관행을 바꿀 수 있는 초석이 되길 기대해본다.


Posted by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민우회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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