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2007.08.30 11:54

상담소의 눈

욕정을 못 이기거나 혹은 일으키거나?

달개비 l 상근활동가

가해자의 언어 ‘욕정을 일으켜’ 삭제 사건
상담소에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처음으로 법정지원을 했던 성추행사건의 피해자는 4년 넘게 진행된 고소과정 동안 빠짐없이 공판에 참석한 열성적인 생존자였다. 몇 번의 재판이 진행되고 검사가 피의자 심문을 하면서 ‘욕정을 일으켜~성추행을 했다’라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청석에 있던 생존자가 벌떡 일어나 판사에게 ‘욕정을 일으켜~’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니 삭제하라고 요청을 했다. 일순간 검사의 목소리만 들렸던 고요한 법정은 술렁였다.

동석했던 나 또한 생존자의 이런 행동이 판사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법정모독죄나 괘씸죄로 피해자에게 해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다행히 기우였다. 성폭력 사건을 설명할 때면 무심코 혹은 관례적으로 사용되었던 ‘욕정을 일으켜~’는 성폭력 가해를 이해가능한 일 혹은 실수쯤으로 축소하는 것 아니냐는 생존자의 주장이 받아들여졌고 판사의 직권으로 ‘욕정을 일으켜~’는 삭제되었다.


구태한 소설의 한 구절이라면
몇 년 전 한 법정에서 삭제되었던 ‘욕정을 일으켜’가 2007년 현재는 어떨까?

‘피해자가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욕정을 일으켜...’
‘여자 아동을 보면서 욕정을 일으켜...’
‘잠자던 피해자를 발견하고 성적 호기심을 느낀 나머지...’
‘노상을 지나가는 피해자를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욕정을 일으켜...’

성폭력 사건의 판결문을 모아봤더니 구태한 소설 구절들의 전시장 같다. 소설이라면 픽션이니 천박한 상상력을 비웃거나 혀끝을 차주면 된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 판결문에 욕정을 일으켜 성폭력 가해를 했다고 기술하는 것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욕정을 일으킬 만한 행위를 했을 거라는 피해자유발론을 전제하거나 성폭력은 남성의 절제할 수 없는 성욕 때문에 일어난다는 뿌리 깊은 통념을 반영한다. 이런 통념은 가해 행위를 ‘이해’하려는 듯하다. 때문에 피해자의 목소리를 배제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상담소에서는 2007년, 법정 사용문구 잘못된 성폭력 통념 거둬내기 프로젝트를 착수하기로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건 뭐? delete~!
법정 사용문구 잘못된 성폭력 통념 거둬내기 프로젝트 기획단(깜냥, 달개비, 로시, 로카, 블루, 오이, 위니)은 판결문에서 의례적으로 사용되는 잘못된 통념 문구, 즉 ‘욕정을 일으켜~’가 왜 문제인지 파헤친 후, 9월 초쯤에는 법원, 검찰, 경찰 등이 작성하는 서식에서 이를 삭제하도록 요구하는 공문을 보낼 계획을 갖고 있다.

 + 법정 사용문구 성폭력 통념 걷어내기 기획단, 아자!
블루 l
법정 사용 문구에서 잘못된 성폭력 통념 거둬내기 프로젝트 기획단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형극으로 만드는 재미있는 성교육’ 프로그램 참여로 알게 된 민우회. 인형극을 끝까지 교육받지 못한 아쉬움과 또 다른 좋은 프로그램 참여 기대로 민우회 홈피를 보다가 알게 된 것이 ‘법정 사용문구에서 잘못된  성폭력 통념 걷어내기 프로젝트’!

일곱 살 딸을 키우는 엄마로 성폭력에 관한 뉴스나 각종 언론매체를 볼 때 민감해지는 나로서는 성폭력이라는 문구하나에 흥분 되어서 참여하게 된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실 프로젝트에 의미를 크게 두지는 않았다. 단순한 참여 동기였고 말 그대로 법정 사용문구 수정쯤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깐.

기획단 2차 회의를 하기 전에 받은 성폭력 판결문 모음 자료집. 너무 사실적으로 나와 있어서 자료집 숙지를 해야 한다는 부분이 개인적으로 힘든 점이었다. 가해자들을 일부분 허용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문구들, 판결문 하나하나 마다 빠뜨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들어간 그 문구들을 보면서 아직도 시대에 뒤떨어진 기존의 판례를 그대로 쓰는 대법원 판례의 문제점과 법조인을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의 가부장적 남성 중심적인 우리사회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역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어떠했는가? 나도 어쩌면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의 시간도 가져본다. 사회적 통념이란 건 쉽게 깨트릴 수 없는 부분이다. ‘성’이 들어간 부분은 더욱 견고하고 단단하다. 그래서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깨뜨리는데 어려움이 두 배라 생각된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고쳐져야 할 것이 성에 대한 사회통념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잘못된 성의식과 성문화에 파장은 크고 온갖 성범죄로 우리를 겨냥한 부메랑처럼 되돌아오지 않는가?

부디 바라 건데 내 자신부터 다시 한 번 올바른 성의식 고취와 모두가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하지 말기 바라며, 성폭력 통념 걷어내기 프로젝트가 올바른 인식을 이끌 수 있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 성폭력 통념 걷어내기 기획단 여러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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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민우회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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