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2008.02.14 14:40

||| 상담소의 눈 |||


관계의 연속선에서 일어나는 스토킹1) 


이선미(상근활동가)


 애인이 헤어지자고 했더니 죽겠다며 아파트 옥상에 있다고 전화가 왔어요. 겨우 진정시켜 내려오게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 정말 죽을까요?


 라고 시작한 상이의 상담2)은 길게 이어졌다.


 하은과 상이는 3년동안 연애를 했다. 상이는 하은이 화가 날 때면 자신의 화를 억누르지 못해 과격한 말을 하며 자신을 공격했지만 평상시 너무나 다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어느 날 말다툼 끝에 하은이 화를 참지 못하고 상이의 뺨을 때리면서 둘은  크게 싸우게 되었다. 그 뒤 하은은 상이를 매일 찾아와 사과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꺼라 약속하고 또 약속했다. 3년 동안 연애하면서 처음 있었던 일이고 평상시 하은은 상이를 너무나 아껴주는 사람이었기에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고 그런 가운데 상이는 예전에 사귀던 애인과 우연히 연락이 닿아 하은 몰래 만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하은은 불같이 화를 냈고 말다툼 끝에 하은은 상이의 배를 주먹으로 치며 구타했다. 이번에 상이는 헤어지겠다 결심했다. 하은은 다시 한번 자신을 용서해 달라며 빌었지만 상이는 마음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결국 둘은 헤어지기로 했고 정리를 위해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하은은 상이와 연애시기 찍었던 나체 사진을 보여주며 지금은 헤어지지만 자신이 요구할 때는 언제든 만나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했다. 당황한 상이는 생각해 보겠다고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상이는 하은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상이 없이는 자신이 살 의미가 없다며, 자신은 죽겠다는 내용이었으며 지금 죽으려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와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상담원은 상이의 상황이 전형적인 스토킹 피해의 초기단계라 판단한다. 그 이유는 하은의 행동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위협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행동으로, 동정심유발과 위협을 동반한 협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이는 헤어지고 싶지만 하은의 이런 행동 때문에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하은이 얘기한 사진유포나 자살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상이의 모든 것을 위축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은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런 행동은 상대의 약한 고리를 공격해 심리적으로 위축시킨 후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스토커의 일반적인 특성과 일치한다. 하지만 하은의 행동이 명확하게 스토킹이라고 인지하기 위해서는 반복성이 있어야 하며, 따라서 하은의 행동이 스토킹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유보된다. 때문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남긴다.


 연인과의 결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관계의 지속을 요구하는 하은의 행동은 맹목적인 사랑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상이는 상담 과정에서 ‘하은이 자신을 정말로 사랑해서 헤어지기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대로 이별을 밀어붙여서 정말 죽기라도 한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하은의 행동에 당황스럽지만 한편으로 사랑을 잃게 될 위기 앞에 놓인 사람의 극단적인 처방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별을 요구하는 사람으로서 마지막 예의를 다하여 설득하거나 상대에게 시간을 주는 것 아니면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스토킹 초기라고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대응을 낳는다. 스토킹 초기라고 판단한다면 더 이상의 여지를 두지 않고 단호히 관계를 단절해야만 한다. 스토커는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거나 자신의 행동으로 상대의 선택에 변화가 생기면 그것을 기회로 삼아 더욱 거센 공세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의 연장선 안에 있는 스토킹은 이러한 결심을 어렵게 한다. 스토킹이 발생하는 ‘관계’와 스토킹이 시작되는 ‘지금 이순간’은 결코 단절적이지 않다. 관계의 끝맺음과 스토킹의 시작이 공존하는 연속된 시간이 존재하며, 그 상황에 처해있는 누구도 무 자르듯 구분하기 어려우며 스토킹이 시작되는 ‘지금 이순간’이 언제인지 선을 긋는 것도 역시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상대방이 ‘어느 정도’의 선을 넘으면 어떤 형태로든 단호한 거부와 외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어느 정도’가 언제부터인지, 어떤 행동이 시작하는 시점인지 판단하는 것은 연속된 시공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스토킹은 초기대응이 중요하다. 왜냐면 한번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는 것을 본 스토커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요구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토킹 상황이 장기화 될수록 절대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 커지기 때문에 대응하는데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리고 장기화된 스토킹은 피해자를 지원해줄 수 있는 자원을 고갈시키기도 한다. 이것은 스토커의 전략에 의한 것이기도 한데, 피해자가 혼자 일 때 스토커의 요구가 더욱 쉽게 관철되기 때문에 피해자의 약점을 공개하겠다고 하여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하거나, 직접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여 피해자가 혼자가 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을 반복하며 스토킹 상황이 유지된다.


 이런 악순환을 반복하는 스토킹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기에 스토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다는 것을 단호히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친밀함을 나누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친밀감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이 스토킹의 특징이기에 관계맺음이 폭력으로 전환되는 순간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욕구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일방의 욕구가 압도적으로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은이 정말로 상이를 좋아하고 헤어지기 싫어서 취했던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하은은 소통 속에서 자신이 감수하거나 양보할 것을 조절하지 않고, 자신의 요구에 상대를 무조건 맞추려고 하고 있다. 이 상황을 무엇으로 명명하느냐에 따라 상황에 대한 내 욕구와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상황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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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토킹에는 모르는 사람에 의한 스토킹이나 망상에 의한 스토킹 등 여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이 글은 (전)애인/배우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토킹의 초기단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때문에 여기서 사용된 스토킹, 스토커라는 용어는 (전)애인/배우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토킹, (전)애인/배우자 였던 스토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2)  이 상담은 (전)애인/배우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스토킹 초기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각색, 편집된 내용이다.


Posted by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민우회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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