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2005.08.30 11:15

한 달 전쯤 이사를 했습니다.
얼마 전 선배 한 분이 예전 당신이 살던 동네로 제가 이사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어디쯤이냐고 물었습니다.
“‘강강수월래’라고 커다란 갈비집이 있구요...”
“그래, 그 맞은 옆에 ‘맹순이 꽃게집’ 있고...”
“네, 맞아요. 그 꽃게집!”
아, 이거 뭔가 그 선배와 무척이나 가까워진 듯 한 느낌!
“그래, 그 옆에 ‘영빈제과’ 있쟎아.”
‘아, 이를 어쩐다. 영빈제과?’ 아무리 머리 속을 헤집어 봐도 그런 제과점은 통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선배와 애써 만들어 놓은 공감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던 저는 그냥 “네, 맞아요. 영빈제과, 그 맞은 편 어디쯤이에요.”라고 맞장구를 치고 말았습니다.

어제 고량주 몇 잔에 얼큰하게 취한 채로 집까지 걸어가는 중에 ‘맹순이 꽃게집’을 지나치면서 문득 그 선배 말이 떠올라 그 옆 어딘가 있다는 ‘영빈제과’를 찾아보았습니다. 드디어 발견! ‘영빈제과’는 하얗게 불을 밝힌 유명 대기업 전자대리점의 거대한 간판 옆에 참으로 작고 보잘 것 없는 데다 요즘 시대에는 도통 어울리지 않을 촌스러운 네온싸인 간판을 번쩍거리며 정말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게트’나 ‘○○베이커리’와 같이 빵집 이름이 영어 일색인 요즘은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한글 상호인 데다가 진작에 주류에서 밀려난 반지르르 윤기가 흐르는 단팥빵이나 땅콩 조각이 촘촘히 뿌려진 크림빵이 주종인 그런 제과점이 그 선배는 어떻게 유명 대기업의 전자대리점보다 먼저 떠올랐을까. 저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이내 기분 좋은 웃음이 밀려 올라왔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라는 명제는 너무 뻔해서 보통은 망각하며 살아가지만 인간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자명한 진리 명제 중 하나입니다. 생존을 위해 구성된 사회 속에서 ‘인간’은 생물학적 범주를 뛰어넘어 사회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권리’에 따라 시·공간적으로 상이한 의미들로 구성됩니다. 예컨대 조선시대 양반 신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사회적으로 어떠한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던 노비들은 그 사회에서 ‘인간’이 아니라 ‘재산’이었습니다. 그 당시 여성 역시 ‘인간’이라기보다는 독점적으로 ‘인간’의 지위를 점하고 있던 남성 중심의 사회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교환수단’이면서 ‘재생산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성주의는 여성이 스스로를 ‘인간’으로 호명한 그 순간부터 시작된 통찰임과 동시에 ‘인간’인 여성에게 심대하게 억압적이지만 이를 떠나서는 절대로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관계망을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제게 여성주의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연적 선택입니다. 오직 남성만이 ‘인간’으로 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여성인 제가 ‘인간’ 선언을 한다는 것은 곧 기존의 남성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적 관계망으로부터 소외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회적 동물’인 제가 생존하기 위해 대안적인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게 이는 늘 힘에 벅찬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순간은 지독하게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입니다. 여성인 제게 너무나 당연한 듯이 강요되지만 제 깜냥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들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심지어 여성들조차 ‘참 별스러운 애 다 보겠다’는 반응을 보일 때는 거대한 장벽에 둘러싸여 철저히 고립된 듯한 좌절과 절망에 지칠 때가 많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지 하며 이를 앙다물어도 약해빠진 이내 심신은 고립감에서 오는 외로움과 공포로 인해 수시로 무너져 내리곤 합니다.  

어제도 친하지만 친하지 않은 ‘실명’의 군중들 틈에서 자기연민에 빠져 고량주 몇 잔을 물처럼 들이키고 울적한 걸음을 옮기던 저는 그간 제 시선의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던 ‘영빈제과’를 발견하고 문득 저의 지독한 외로움과 공포의 탈출구인 이해와 연대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였습니다. 계급, 인종, 민족, 종교 등에 따라 다양한 삶의 조건들에서 저마다 다른 경험을 구성하며 살아가는 여성들간의 연대 가능성은 현재 여성주의의 주요한 고민거리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거창한 학문적 수준에서 뿐만이 아니라 제 구체적인 경험에만 국한해 봐도 여성노동자, 성매매 여성, 중산층의 전업주부 여성, 여성장애인, 레즈비언 등 저와는 다른 조건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이해와 연대를 얘기하는 것이 마치 연대감과 위선, 공감과 몰이해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제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던 ‘영빈제과’의 발견은 이러한 막연한 의구심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었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대의 출발점은 자기 시선의 사각지대를 인정하고 다른 이의 시선에 포착되는 수많은 ‘영빈제과’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눈에는 어린 시절 제법 귀한 음식이었던 먹음직스럽게 윤기가 반들거리던 빵에 대한 선연한 기억으로 인해 낡고 초라한 제과점 간판이 유명 대기업의 전자대리점 간판보다 더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자신의 시선 범위 내에는 무엇이 위치하며 그것이 자신의 존재 조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한다면, 자신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전자대리점이나 제과점이 거기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사각지대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다른 이의 시선을 빌어 찾고자 애쓴다면, 그리고 낡고 초라한 제과점 간판보다 화려하고 큰 전자대리점 간판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보편적이라고, 정상이라고 감히 재단하지 않는다면 이해와 연대의 폭이 한층 넓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발견! 저는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발견한 생존의 가능성이 즐거워서,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부동(不動)은 안중에도 없이 다른 이들의 철옹성에 대해 푸념만 일삼은 저의 어리석음이 민망해서 허허 웃고는 휘적휘적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습니다.  


영자(자원상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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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민우회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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