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소ing2009.04.10 16:33

삶의 한가운데서

 여성주의 상담을 만나다.

칼리

 

 해마다 봄의 문턱에 민우회 성폭력상담원교육이 열린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업무시간과 교육시간이 겹쳐서 수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수년을 벼르고 벼르다가 사표를 내고서야 교육을 받게 된 것은, 아마도 민우회의 여성주의 상담교육이 내 삶의 전환기와 인연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15일 교육기간 동안 주제 하나 하나가 너무나 세심하게 배치되어서 강의 하나도 빠뜨릴 수 없기도 했고, 교육을 통해 나를 해석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매순간 깨어 있으려고 애썼다.

 ‘페미니즘의 즐거움은 나를 해석하는 능력이다. 또한 페미니즘은 나를 해석하는 능력이자 세계를 해석하는 능력이며, 질문을 재구성하는 것이다.’는 메시지가 머리에 맴돌았고, 나는 나를 해석하기 위해 어렴풋한 기억들을 길어 올려 보았다. 기억뒤편 심연 아래 숨어있던 성폭력의 파편과 생채기들을 하나둘씩 건져 올리면서, 나의 마음과 몸은 넘어지고 엎어지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조금 오래된 기억....

 19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반 경, 우리 동네에 영화포스터가 붙는 날이면 아이들은 게시판주위로 몰려들었다. 극장관계자가 커다란 붓에 풀을 쓱쓱 발라서 영화포스터를 붙이고 나면, 통장이었던 삼촌과 구멍가게를 하는 할머니는 영화초대권을 구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할머니를 졸라서 영화표를 얻곤 했다. 버스로 세 정거장 이내에 있었던 두 세 개의 극장까지 걸어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참 재미난 일이었다.

 불이 꺼지고 흥미진진한 영화가 시작되면 스크린 속으로 푸욱 빠져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옆 자리로 옮겨와 하얀색 원피스를 파고들던 익명의 손...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영화를 계속 보았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자리도 옮겨보고 중간에 나오기도 했다. 얼마 뒤에는 극장관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아저씨들은 자기들 맘대로 나의 극장구경 권리를 박탈했다. 내가 단지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난 아무에게도 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

 

 80년대 후반 고교시절 등굣길의 지하철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꽉 들어찼다. 타는 곳이 종점이 아니고 승객이 워낙 많아서 항상 서서 갈 수밖에 없었던 지하철 4호선은, 내가 승차하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내릴 때까지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하차할 때까지의 시간은 대략 15분이었는데, 그 시간은 무지무지 길게 느껴졌다.

 하루 십 여분의 시간을 등굣길 3년 내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남자들이 몸을 밀착하거나 성기를 들이밀거나 손을 이용하여 내 몸을 만져댔다. 난 고작해야 어쩌다 손을 꼬집어주거나, 째려보았다. 한번은 소리를 지르기도 했는데, 도리어 무지막지한 욕지거리를 들어야 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내가 지하철에 탑승하는 사람 중에서 가장 만만한 여학생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성폭행이라는 개념이 없었지만, 친구들끼리는 성추행의 경험을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 내 몸이 반응하거나 오묘한 쾌감이 오기도 했다는 것은 얘기할 수 없었다.

 

 이십대 초반에 직장 회식자리에서 남성상사에게 폭행을 당했다. 여직원회 차원에서 “우리는 꽃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돌리고, 정시출퇴근을 하며, 폭행 가해자 처벌을 요구했다. 여직원회 총회 때 선배들이 했던 얘기에 의하면, 상사들이 재떨이를 날리거나 따귀를 때리거나 욕설을 퍼 붇는 일들이 꽤 있었다고 했다. 하위직급인 여성들에게는 다양한 폭력이 행해지고 있었다.

 나는 감사실에 찾아가서 폭행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며 징계위원회를 요청했다. 회사는 이런 일을 가지고 징계를 요구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황당해하더니, 피해자도 같이 인사위원회에 회부되어야한다고 통보해왔다.

 인사위원회에 출석했던 날, 나는 인사위원들로부터 ‘너도 맞을 짓을 했겠지...그냥 때릴 리가 있겠어...’가 주요내용인 다양한 질문을 받았고 억울해서 펑펑 울기만 했다. 세상에 맞을 만한 일이 과연 무엇이길래, 그들은 ‘네가 분명 피해를 유발했을 것이다’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운동사회내의 그 많던 MT는 거의 혼숙이었다. 프로그램이 종료되면 술자리로 이어지고, 잠잘 때쯤이면 커다란 방 구석구석에 빈자리를 찾아가 잠을 자고는 했다. 웬만큼 자기목소리 내던 20대 후반의 어느 날, 여느때와 같이 그날도 혼숙으로 잠자리를 편재하고 잠이 들었다.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의 가슴을 더듬대던 손. 여전히 나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고, 몸을 뒤척이는 척하며 손을 빼냈었다.

 같은 공간에서 계속 봐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얼마 후 무슨 얘기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만났는데, ‘저 사람이 내가 좋아서 그런건가..’ 하면서 연애를 시작 해버렸다. 성폭력으로 시작된 연애... 내가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십대 때 몇 차례의 연애를 했지만, 몸을 느끼고 표현하는데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사회규범적으로 형성된 나의 통념에 의하면, 연애라는 관계에서 특히 섹스라는 특정 순간에 여성은 수동적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리드를 당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평소에는 자기주장이 매우 강한 편이었지만, 특정 순간에 여성화된 언어와 몸짓을 구현하며 관계를 맺었다. 성에 대한 이중규범과 통념에서 벗어난 것은 서른이 다되어서였다. 섹슈얼리티로부터의 해방은 더디고 힘들었고,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이 몇 가지가 몸에 대한 침해와 폭력의 경험이고, 나의 피해와 생존의 경험이다. 그리고 아직 관계의 지속성 때문에 저 깊은 우물에서 길어낼 자신이 없는 기억들도 있다.

 내 경험은 여성들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폭력 상황과 거의 같거나 비슷하다. 난 어린아이였고, 여학생이었고, 젊은 여성이었고, 여직원이었고, 여성활동가였다. 그게 이유의 전부다. 폭력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침탈이었다.

 나에게 가해를 했던 사람들은 나와는 성별, 나이, 육체적인 힘, 물리적 힘, 사회적 지위, 경제력 등이 달랐다. 그냥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권력을 가진 것이었고, 그 권력을 폭력적으로 행사한 것이었다.

 

 성폭력의 원인은 남성의 성욕구와 피해자의 처신 때문이라는 사회통념이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린이들은 왜 성폭력의 피해자일까? 어린아이들이 성욕을 자극하고 피해를 유발해서?

그건 너무나 명확하다. 아이들은 방어능력과 판단력이 없고, 가해자가 폭력이나 협박을 하지 않고도 성폭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을 포함한 모든 폭력은 충동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문제다. 성적 욕망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보고 일어났는가는 개인적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통념과 관련하여 민우회 성폭력 상담원 15기 교육생들은 ‘성폭력은 왜 발생하는가?’ 하는 근원적 질문에 대하여, 피해자 유발론에서 자유롭기 힘들었고 각자가 가진 성각본과 통념에 지독히 부딪쳐야 했다. 또한 같은 여성이라도 경험, 인지, 자원, 경제력에 따라 편차가 다양하듯이, 15기 상담원 교육생들도 다양한 위치와 경험과 인식에서 교육을 자기화 해나갔다.

 

민우회 성폭력 상담원 교육은 여성주의 상담이라는 풍성한 종합선물세트 안에 다양한 주제들을 배치해놓았다. 여성주의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며 여성주의가 어떻게 사회를 또렷하게 보게 해주는지를 시작으로, 성폭력의 개념과 성폭력 통념깨기, 성폭력 피해 수사과정과 지원, 성폭력 피해의 대응방법과 법적한계, 스토킹과 데이트성폭력, 10대 섹슈얼리티, 성적자기결정권의 이해, 성적소수자와 성정체성, 장애인성폭력, 어린이성폭력, 동성간성폭력, 친족성폭력, 성폭력 상담실습 및 상담기법, 성폭력 가해자, 반성폭력운동의 역사 및 여성주의 상담에 이르기까지 1년을 교육받아도 시간이 모자랄 어마어마한 내용들이었다.

 

민우회 성폭력상담원 교육기간은 나의 권력, 가해경험과 피해경험에 대한 성찰시간이기도 했다. 권력은 늘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주 예민한 감수성을 계발하며 살아가야 한다. 나이, 외모, 학력, 국적, 성적지향, 장애여부 등에 따라 내가 누군가에게 상대적으로 우위를 가질 수 있고, 권력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

 나는 상처와 피해의 상흔들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부단히 피해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릴적 성폭력의 기억을 자위로, 성인이 돼서는 성폭력 경험을 연애로, 운동사회에서는 성희롱 피해를 조직보위론으로 삭히는 등 여러 과정을 겪었다. 이 과정에 깊은 성찰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상처는 그냥 봉합되기도 했다.

 

성폭력상담교육의 강사 중에는 상담원 교육 1기나 기수가 없을 당시 교육을 받고 활동을 시작하신 선배들이 있었다. 그 선배들의 노력으로 성폭력은 사회문제화 되었고, 성폭력이 성별권력의 문제이며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로 이슈화하고 설명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성폭력의 개념이 정신적, 언어적, 신체적 폭력 전반을 아우르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성폭력이라는 언어를 만들어내고 개념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은 여성운동과 여성주의 상담의 운동과정이었다.

 

민우회 교육을 마치면서 난 용감하게 여성주의 상담을 해보리라 결심한다.

여성주의 상담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담자가 될 나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나와 세계를 해석하고, 피해자의 문제를 여성주의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준비를 더 꼼꼼히 해야 할 것이다. 내담자의 피해복구를 대행하는 것이 아닌 피해자가 주체가 되는 상담활동을 해보고 싶다. 여성 스스로 힘을 갖는 상담을 위해서 성적 의사소통을 막는 권력관계를 세밀하게 바라보고, 성폭력을 유발하는 불평등한 권력구조에 저항하고, 내담자와 함께 치유와 생존, 그리고 사회를 바꾸어나갈 힘을 길러보고 싶다.

 

 

‘상담장면에서 상담자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상담의 목적은 내담자의 독립이다. 더디가도 야무지게, 내담자의 성장과 발전을 촉진하라. 공감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상담은 진행하지 말아라. 상담자가 공감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오히려 갈데가 없다.’라는 강의 내용이 떠오른다. 내 인생의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 같은 성폭력상담원 교육을 계기로, 여성주의 상담 그 길에 더디가도 야무지게 가려고 한다.

 

 

- 이 글은 2009년 15기성폭력전문상담원교육을 수료한 칼리님이 작성해주셨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민우회성폭력상담소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