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2006.10.20 15:16

<상담소의 눈>

 변명하는 그 입, 다물라!                                          

이임혜경
/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

 남의 이야기는 사흘을 못 간다는 말이 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기사들이 넘쳐나니 잠깐의 감탄사를 연발하거나 주변 사람에게 정보(?)를 주는 정도로 이야기는 잊혀진다. 요즘처럼 사건, 사고가 많은 경우에 그 잊혀지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듯도 하다.

하지만 사회단체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돌아다니는 많은 사건들 중에는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남의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과 해결과정을 함께 할 순 없으나 그렇다고 남의 이야기로 밀쳐 낼 수도 없어 숙제처럼 쌓아두고만 있는 것이 그 하나이고, 또 어떤 ‘남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강한 책임감 또는 의무감을 갖게 된다.    

 이제부터 2006년 상반기, 6개월이라는 길지도 짧지도 않는 그 기간동안 발생하고 계속되고 덮히고 잊혀진 많은 성폭력 사건들 중 용산 초등학생 성폭력 살해사건과 최연희 성폭력 사건에 대한 풀리지 않은 얘기들을 시작해볼까 한다.    

 ‘정의’를 정의하다
지난 2월,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하러 나왔던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을 가해자가 자신의 신발가게로 유인해 성폭력하고 살해한 후 불태운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그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가해자가 지난해 5살 여자아이를 성추행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전과 9범(성범죄 포함)이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 하였다.

이후 1차 공판에 앞서 청소년단체와 여성단체는 국가의 실효성 있는 정책마련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성폭력으로 죽어간 아이들을 기리는 합동 위령제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용산 초등생 성폭력살해 사건이 있은 후 약 두 달이 지난 4월 13일, 이 사건에 대한 선고 공판이 있었다. 그 결과 주범에게는 무기징역을, 공범인 아들에게는 징역 3년(사체유기)을 선고하였다.

판결문에는 가해자가 ‘욕정을 이기지 못해’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가해자의 범행이 반인륜적 범죄이며 그로 인해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인정하기는 하겠으나 가해자의 범죄가 의도적이지 않았고 이후 반성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에 대한 의미를 덧붙이고 있었다.

가해자가 ‘반성’하고 있고,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법원은 이 가해자가 처음 범죄를 저질렀을 당시에도 ‘범인 김씨가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해자는 또다시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으니 그 당시 반성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는 ‘욕정’은 못 이기는 그 무언가가 아니다. 욕정의 표출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었고, 이는 범죄라는 것을 가해자는 알면서도 행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가해자는 과연 무엇을 반성하고 있고, 무엇이 의도하지 않은 범행이라는 말인가.

그 당시 한 라디오 방송에 흘러나온 강지원 변호사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형법 체계상 성범죄는 강도죄와 형량이 유사하다. 그런데 재물을 빼앗는 강도죄에 대해선 집행유예 판결을 잘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인격을 파괴하는 성범죄에 대해선 돈 몇 푼 주면 집행유예가 나는 관행이 있다”

사람들의 분노하는 지점을 읽지 못하고 여전히 이렇듯 관행적인 판결을 하는 재판부를 어디까지 믿고 그 ‘현명함’을 신뢰해야 할지 의문스러운 지점이다.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기 노력하는 재판부, 그리고 남성중심적 성문화와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깨는 판례를 만드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그럼 무엇을 기억하는가 
2006년 한 해를 시작하며 언론을 들끓게 했던 사건 중 하나는 ‘최연희 성폭력 사건’이다.
술자리에서 신문사 기자를 성추행한 당시 최연희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이에 대해 ‘술에 취해 음식점 주인으로 착각해 실수를 저질렀다’는 해명으로 다시 한번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성추행 이후 최연희는 사과나 어떠한 해결의 노력은커녕 잠적을 택했고, 사건발생 후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때에 나타나 법적대응을 발표하였다. 결국 피해 기자와 해당 신문사가 가해자를 고소, 고발하는 법적 공방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성폭력을 가한 최연희의 이력은 한마디로 기가 막힌다. 검사출신의 3선의원으로서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심지어 지역구인 강원 동해시에 있는 가정폭력상담소의 이사장직에 있었다.
성폭력 사건 직후 최연희는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후 의원 자진사퇴는 거부하며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지금까지도 보이고 있다.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도 참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사퇴권고 결의안을 통과시키긴 했으나 이 역시 ‘권고’일 뿐이고, 실형을 받지 않으면 국회의원이라는 자리는 임기가 끝나기까지 계속된다. 이에 대해 단체들이 국회의원의 제명처리가 가능 하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며 성명서, 촉구대회, 기자회견 등을 지속적으로 벌여왔으나 현재, 최연희는 여전히 ‘의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개인적인 일로 공적인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생각에...앞으로 잘 하겠다”.     

또한 최연희는 자신의 첫 공판에서 성추행 혐의를 묻는 검사에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답하였고, 가해자(최연희)의 변호인은 재판부에 피고인이 형법 10조의 심신장애자의 적용을 받는 상황, 즉 평소 주량보다 많이 마신 상태에서 사물을 분별할 능력이나 의사결정능력이 없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전문기관의 신체감정촉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DNA 검사 요청을 재판부가 기각하자 최연희 측에서 개인적으로 측정한 감정서를 제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죄 지은 자, 술 탓하지 마라
최연희의 그 동안의 행태와 주장은 성폭력 사건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첫째, 무엇이 개인적인 일이고 무엇이 공적인 일인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이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계속 활동하게 내버려두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에 대한 것이다.
검사출신의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활동하는 것은 공적이고 성폭력을 가한 자신의 행동은 ‘개인적인 일’로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럼에도 무엇을 국민 앞에 사죄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것인지, 일상 속의 성폭력을 밑에 깔고 자신의 캐치프레이즈인 ‘깨끗한 정치, 신선한 정치’는 뭘 말하는 것인지 참 이해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술로 인해 심신장애의 상태였다는 그의 주장이다.
최연희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한나라당은 이번 ‘사건의 발단은 폭탄주’라며, 사건의 근본적 처방을 위해서는 잘못된 음주문화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준비한 망치로 폭탄주잔을 즉석에서 깨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래, 여러모로 좋지 않은 폭탄주는 마시지 말자. 하지만 과연 이번 사건의 근원이 과연 폭탄주 때문일까?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같은 술을 마셔도, 같이 먹고 취하여도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말을 돌리지 않고 꼭 짚어 얘기하자면, 최연희는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살아가는, 국회의원이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혹은 기득권을 가진 남성의 왜곡된 성문화와 성의식 때문인 것이다.


실제로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술에 취한 상태였다고 진술하면 심신미약 상태로 인정받아 형이 감소되거나 기소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를 변호의 중요 쟁점으로 들고 나올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 사회가 성폭력에 대해 얼마나 ‘관대’한 지를 보여주는 한 대목이 아닐까싶다. 더불어 범죄에 대한 진단이 너무 허술한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이래저래 짚고 넘어갈 것은 많으나 뭐 멀어지고 잊어지는 것도 있다고 치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술에 취해 ‘의사결정능력이 떨어져’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국민의 대변자로 자처하는 국회의원으로 계속 용인할 수 있나. 성폭력을 가하는 것이 단지 ‘술’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의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을 언제까지 듣고 살아야 하나.

Posted by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민우회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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